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비트 11세 (문단 편집) == 생애 == 카르틀리 왕국 4대 군주 [[루아르사브 1세]]와 [[이메레티 왕국]]의 군주 [[바그라트 3세(이메레티)|바그라트 3세]]의 딸 타마르의 차남이다. 형으로 [[시몬 1세]]가 있었으며, 동생으로 바크탕, 알렉산드레, 레반이 있었다. 1562년 이란으로 망명하여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다우드 칸(داود خان )으로 개명했다. 1567년 [[사파비 제국]] 샤한샤 [[타흐마스프 1세]]로부터 카르틀리 왕으로 선임되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카르틀리로 진격했다. 그러나 1567년 디고미 전투와 1569년 사마들로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여 카르틀리에서 축출될 위기에 몰리자, 타흐마스프 1세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1569년 타흐마스프 1세의 원군과 합세한 그는 파츠키시 전투에서 시몬 1세와 재차 맞붙었다. 이번에도 시몬 1세가 승리했지만, 퇴각하는 적군을 무리하게 추격했다가 생포되어 이란으로 끌려갔다. 이리하여 형을 몰아내고 카르틀리의 왕이 된 그는 백성들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분노한 백성과 귀족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했고, 그의 실질적인 통치 범위는 트빌리시 인근에 한정되었다. 1578년 이란과 오스만 제국의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의 사령관 라라 파샤가 지휘하는 투르크군이 트빌리시로 쳐들어오자, 그는 트빌리시에 불을 지르고 산악 요새로 대피했다. 라라 파샤는 [[루아르사브 1세]]의 삼남 바크탕 왕자를 카르틀리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사파비 제국의 샤한샤 [[이스마일 2세]]는 오스만 제국에 제대로 저항하지 않고 도망친 그에게 분노해 폐위시키고 시몬 1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복위시켰다. 그는 이란으로 돌아갔다간 목숨이 위험해질 것을 직감하고 산악 요새를 투르크군에게 양도하고 항복한 뒤 이스탄불로 이송되었다가 1579년에 사망했다. 그는 카헤티 왕 [[알렉산드레 2세(카헤티)|알렉산드레 2세]]의 친척 엘레네와 결혼하여 [[바그라트 7세]]를 낳았고, 챠브키시 출신의 여인과 혼외 관계를 맺어 [[사생아]] [[로스톰]]을 낳았다. 훗날 바그라트 7세와 로스톰 모두 카헤티의 왕이 되었다. [[분류:바그라티온 가문]][[분류:카르틀리 국왕]][[분류:1579년 사망]][[분류:폐위된 군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